저는 예수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면 그에게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성서는 예수에 대해 그가 30세 이전에 살았던 삶을 거의 알려주지 않습니다.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 달리기 전 3년의 삶 중에서 일부만 보여줄 뿐입니다.
예수의 삶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비추어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을 김규항씨가 지적했던 것처럼, 태어나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는 교리 나부랭이나 신학의 틀안에서만 바라본다면, 너무나 편협한 사고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생전에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과 행적은 사회적인, 정치적인 메시지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태양으로 부터 지구로 전달되는 많은 파장 중에서 가시광선만 분별할 줄 아는 우리의 눈과 같습니다. 적외선, 자외선, 우주선같은 것들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요.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 예수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 성서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연관지어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쉬운 게 성서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깨달음을 올바르게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 적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편협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사는 당시 사회 문제를 통찰할 줄 아는 눈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도를 통해, 종교의 틀을 통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사회 지도계층을 경멸하셨습니다. 동시에, 지배계층이면서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줄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출신 요셉은 예수와 같은 동지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위대함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참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는, 부조리한 사회, 제도,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설령 그리 살다 죽을 지언정, 그리 살라 하십니다. 예수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렇게 사셨죠… 예수는, 그런 삶을 살다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모두 당시의 지배 계급이죠)에 죽을 줄 알고 사셨고, 로마의 폭력앞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예수의 시선이 저처럼 그나마 여유있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가진 것 없어 노숙하는 사람들,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예수께 영생을 구하러 왔다가 근심만 짊어지고 간 부자청년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는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좇아 살라고 하셨죠.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사회의 낮은 자리에 임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당대에 ‘죄인과 창녀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갖고 계셨습니다. 민족을 팔아먹은 죄인… 그리고 창녀… 지금도 성매매여성은 사회에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죠. 예수는 죄는 미워하시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창녀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미워하셨을 겁니다. 죄에 빠뜨리는 사회 구조, 사람들이 나쁜거죠.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가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급진적입니다. ‘가진 자가 가진 것으로 없는 자를 도우라.’, ‘공중의 새에게 먹을 것을 주고 꽃을 솔로몬보다 아름답게 입히시는, 선한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것이 예수의 가르침 아니던가요?
한국 사회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엄청 통분하실겁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바리새인 취급받을 겁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주는 의미와 실천의 요구는 퇴색되고 재해석된 교리와 신학이 우선일테니까. 그의 가르침은 그동안 너무나 많이 의미가 희석되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